선거/일본의 선거

제1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K66Google 2016. 9. 12.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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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12년(메이지 45년) 5월 15일에 행해진 중의원 선거다.



- 개요
이 선거부터 오키나와 선거구가 추가되었다.


- 선거 데이터
* 내각: 제2차 사이온지 킨모치 내각
* 해산일: 임기만료 1912년(메이지 45년) 5월 15일
* 투표일: 1912년(메이지 45년) 5월 15일
* 개선수: 381
* 선거제도: 대선거구제 (일부 1인선거구제) , 제한투표 (직접국세 10엔 이상 납세하는 만 25세 이상의 남성)
* 유권자수 - 150만 6143명


- 선거 결과

 투표율

 89.58% (+4.29%)

 입헌정우회

 209석

 입헌국민당*

 95석

 중앙구락부

 31석

 무소속

 46석





- 용어 설명

입헌국민당 : 입헌정우회가 조슈번 파벌 정부와 타협한 것에 반발한 반 정우회 각파가 합당운동을 펼치면서 1910년 3월 14일 입헌개진당 계보로 이어지는 헌정본당을 중심으로 우신회*와 무신구락부의 3파가 합당하여 입헌국민당이 결성되었다.
당수는 없으며, 헌정본당의 오오이시, 이누카이. 우신회의 시마다, 코노. 무신구락부의 카타오카, 센고쿠가 중심이 되어 당의 운영을 담당했지만 실제로는 이누카이가 중심이 되어 민당의 전통을 지키고 정부와 선명하게 대립한 '비개혁파'와 오오이시, 시미다, 고노등의 정부와 타협을 도모하는 '개혁파'가 대립하였다.
1913년 다이쇼 정변때는 카츠라 타로의 신당운동에 대해 카타오카 나오하루가 호응, 이누카이가 카타오카를 제명 처분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오오이시, 시마다, 고노 등의 개혁파가 반발하여 탈당하여 카츠라의 입헌동지회에 참가하는 경우가 다수 나오면서 세력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 이후 이누카이가 당수가 되고, 보통선거법 실현을 주장하는 등 호헌운동을 지도하면서 민당으로서 활약했다. 그러나 입헌정우회나 입헌동지회(후에 헌정회)의 공세를 받게 되어 당세는 쇠퇴하였다. 특히 오오이시 등이 속한 개혁파가 헌정회를 결성했을때, 공동으로 내각불신임안 제출을 외치며 막판에 정우회와 같이 헌정회를 공격하는 수법으로 제13회 중의원선거때 결과적으로 국민당의 의석회복으로 연결되었지만, 물의를 빚었다.
1920년 제14회 중의원선거에서는 29명만을 당선시키면서, 1922년(다이쇼 11년) 9월 1일 해산했다. 이누카이는 11월 8일 혁신구락부를 결성하고 다음 정국을 준비하게 된다.


우신회(유흥회) : 메이지 말기에 존재한 혁신계 정당. 입헌정우회에 대항하여 도시생활자의 지원과 대외강경론을 축으로 하였다. 모체가 된 유흥회는 1906년 12월 기성 정당에 불만을 가진 36명의 대의원으로 결성된 정당이며, 러일전쟁 이후 정부의 팽창 예산과 증세 방침에 반대하며 전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헌정본당, 대동구락부와 연계하여 정우회의 제1차 사이온지 내각의 정책을 규탄하고 국민 부담의 경감과 군사 우선 정치의 해소를 요구했다. 반면 대외적으로 매파적 색채가 강해서, 헤이그 특사 사건에 대해 정부와 한국통감부의 대응을 '저자세'라고 비판했다.

1908년 제10회 중의원 선거때 의석이 29석으로 감소하면서 보다 폭넓은 세력 결집을 목표로 하기 위해 우신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헌정본당, 대동구락부, 감신구락부와 합당을 지향했지만 우신회가 '관료 정치 타파'와 '삼세폐지'(통행세,직물세,소금 전매) 를 양보하지 못하여 결렬되었다. 그 해 의회에서는 삼세폐지에 쌀 수입 관세 인하, 전차 요금 인상 저지 등을 내걸고 정부와 대결하는 한편 한일합병은 지지했다.

1910년 들어 대동구락부와 무신구락부의 합당(중앙구락부 결성) 얘기가 나오면서 10명이 탈당하고 당내에 무명회가 결성되었다. 그런데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중앙구락부 결성에 반대하는 무신구락부 의원과 무명회 등이 합당을 추진하고 3월 18일, 무신구락부 잔류파와 무명회, 헌정본당, 우신회 탈당파가 먼저 창당한 중앙구락부에 대항하는 형태로 입헌국민당을 창당한다. 이에 우신회 소속 의원은 17명으로 감소하고 동년 12월 21일 해산하였다. 소속 의원들은 무소속으로 지내다가 후에 입헌국민당이나 입헌정우회 등에 흡수되었다.






* 지역별 의석 현황 (득표수, 당선자명, 무소속 후보의 선거 후 입당은 생략)

 도도부현 (총 의석 수)  여당 (입헌정우회)

 야당

 홋카이도 (6)  입헌정우회 5  중앙구락부 1
 아오모리 현 (6)  입헌정우회 6  
 이와테 현 (6)  입헌정우회 4  입헌국민당 2
 미야기 현 (7)  입헌정우회 4  입헌국민당 3
 아키타 현 (7)  입헌정우회 3  입헌국민당 4
 야마가타 현 (8)  입헌정우회 5  입헌국민당 3
 후쿠시마 현 (9)  입헌정우회 5  입헌국민당 4
 이바라키 현 (10)  입헌정우회 7  입헌국민당 2, 무소속 1
 토치기 현 (7)  입헌정우회 4  입헌국민당 2, 무소속 1
 군마 현 (8)  입헌정우회 5

 입헌국민당 1, 중앙구락부 1, 무소속 1

 사이타마 현 (9)  입헌정우회 5

 입헌국민당 4

 치바 현 (10)  입헌정우회 5  입헌국민당 4, 무소속 1
 도쿄 부 (16)  입헌정우회 4  입헌국민당 7, 무소속 4, 중앙구락부 1
 카나가와 현 (8)  입헌정우회 3  입헌국민당 3, 무소속 2
 니가타 현 (14)  입헌정우회 7  입헌국민당 6, 무소속 1
 토야마 현 (7)  입헌정우회 5  입헌국민당 2
 이시카와 현 (6)  입헌정우회 4  입헌국민당 1, 무소속 1
 후쿠이 현 (5)  입헌정우회 4  입헌국민당 1
 야마나시 현 (5)  입헌정우회 3  입헌국민당 2
 나가노 현 (10)  입헌정우회 8

 중앙구락부 1, 무소속 1

 기후 현 (8)  입헌정우회 4

 중앙구락부 2, 무소속 2

 시즈오카 현 (10)  입헌정우회 7  입헌국민당 2, 무소속 1
 아이치 현 (13)  입헌정우회 9  입헌국민당 2, 중앙구락부 1, 무소속 1
 미에 현 (9)  입헌정우회 5  무소속 3, 입헌국민당 1
 시가 현 (6)  입헌정우회 3  입헌국민당 3
 교토 부 (8)  입헌정우회 3  중앙구락부 3, 입헌국민당 1, 무소속 1
 오사카 부 (13)  입헌정우회 6  중앙구락부 3, 무소속 3, 입헌국민당 1
 효고 현 (14)  입헌정우회 3

 입헌국민당 10, 무소속 1

 나라 현 (5)  입헌정우회 3  입헌국민당 2
 와카야마 현 (6)  입헌정우회 3

 무소속 2, 중앙구락부 1

 돗토리 현 (4)  입헌정우회 1  무소속 2, 중앙구락부 1
 시마네 현 (7)  입헌정우회 3  중앙구락부 3, 무소속 1
 오카야마 현 (9)  입헌정우회 2  입헌국민당 6, 무소속 1
 히로시마 현 (12)  입헌정우회 4  무소속 4, 중앙구락부 3, 입헌국민당 1
 야마구치 현 (8)  입헌정우회 6  중앙구락부 1, 무소속 1
 도쿠시마 현 (6)  입헌정우회 5  입헌국민당 1
 카가와 현 (7)  입헌정우회 3  무소속 2, 입헌국민당 1, 중앙구락부 1
 에히메 현 (8)  입헌정우회 4  입헌국민당 2, 무소속 2
 고치 현 (6)  입헌정우회 3

 입헌국민당 3

 후쿠오카 현 (14)  입헌정우회 9  입헌국민당 4, 무소속 1

 사가 현 (6)  입헌정우회 2  입헌국민당 2, 중앙구락부 1, 무소속 1
 나가사키 현 (8)  입헌정우회 6

 입헌국민당 1, 무소속 1

 쿠마모토 현 (9)  입헌정우회 3

 중앙구락부 6

 오이타 현 (6)  입헌정우회 2

 무소속 3, 입헌국민당 1

 미야자키 현 (4)  입헌정우회 3

 중앙구락부 1

 가고시마 현 (9)  입헌정우회 9  
 오키나와 현 (2)  입헌정우회 2